햇빛이 창을 뚫고 얼굴에 부서지자 제법 따가웠다. 그러다 이내 구름이 밀려오면 하늘은 다시 흐려졌다. 해와 구름이 밀어내기를 반복하는 늦여름 프랑스였다. 지난 9월 16일 오후 2시(현지 시간) 기자가 탄 프랑스산 소형 해치백 승용차는 수도 파리 남쪽 13구(13E ARR.)의 한 2차선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도로 양 옆으로 유럽을 상징하는 신고전주의(neo-classic)풍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상아색을 띠고, 형형색색 깃발이 나부끼는 이국적인 건물…. 특히 바로크 양식의 관공서와 대학, 뾰족이 솟은 첨탑이 상징인 고딕 스타일 성당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방해꾼이 등장했다. 비좁은 차도로 몰리는 차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사이, 매력적인 풍경은 이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시내를 벗어나 프랑스 동부지역을 잇는 고속도로 A4로 진입하자 서서히 분위기는 달랐다. 지평선 끝까지 초원이 펼쳐지다, 현대식 빌딩을 지나치는가하면 나지막한 유럽식 단독주택 밀집지도 언뜻언뜻 보였다. 왕복 8차선 고속도로로 진입한 후 승용차는 미끄러지듯 달렸다. A4를 따라 농촌과 도시, 공장과 주택 등 대조적인 풍경이 쉼 없이 스쳐갔다.
파리 도심 13구 남동쪽 말단에서 고속도로로 진입한 승용차는 마른 라 발레(Marne-la-Vallée) 신도시 중심부 뷔시 생 조흐쥬까지 20여 분만에 도착했다. 고속도로 A4는 마른 라 발레를 동서로 관통하는 간선 고속도로다. 파리 센과 마른느 강변을 따라 이어진 A4는 신도시를 꿰뚫고, 북동부 도시 랭스(Reims)를 경유해 스트라스부르(Strasbourg)까지 연결된다.
A4는 마른 라 발레를 따라 구축된 광역급행열차(RER) A 노선과 함께 파리를 연결하는 중요한 혈맥 역할을 한다. A4와 RER A가 마른 라 발레를 동서로 횡단한다면, 남북으로 고속도로 A104와 N104, 고속철도 테제베(TGV)가 종단한다. 3개의 고속도로와 2개의 철로로 그려진 광역교통망 밑그림 위에 신도시가 내려앉은 형상이다.
마른 라 발레는 파리에서 동쪽으로 17km 가량 떨어져 있다. 지난 1969년 프랑스 수도권 5대 신도시 중 하나로 계획된 마른 라 발레는 조성 당시 면적이 150㎢(1만5000㏊), 인구는 50만 명 규모였다. 우리나라 수도권 신도시 중 최대 규모인 성남 분당(면적 19.7㎢·계획인구 39만 명)과 비교하면, 인구는 비슷하지만 면적은 7.5배나 차이 난다.
마른 라 발레는 마치 자를 대고 긋듯 신도시 구획을 다시 나눠 토지이용계획을 짰다. 도시 서쪽부터 순서대로 1섹터(Porte de Paris), 2섹터(Val Maubee), 3섹터(Val de Bussy), 4섹터(Val d’Europe)로 나눈 것이다. 1섹터는 상업·업무단지가 복합적으로 구성됐다. 2섹터는 주거와 연구 밀집시설을 주로 배치토록 해 공동·단독주택이 혼합된 주거전용지역과 대학·연구시설이 밀집한 데카르트(Descartes) 단지로 구성됐다. 3섹터는 자연환경과 도시개발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계곡과 언덕 등 기존 자연녹지를 이용해 주거지를 조성하면서 저밀도 토지이용을 도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가장 동쪽 4섹터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디즈니랜드 파리’(옛 유로디즈니)가 위치한 구획이다. 글로벌 관광객 유치를 매개로 한 마른 라 발레의 상징이기도 하다.
마른 라 발레를 네 개 섹터로 나눈 건 기존 취락의 재개발과 신시가지 개발을 병행하는 동시에, 주거지와 자연의 접촉을 최대화하기 위한 전략 차원이기도 했다.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 마른 라 발레 인근에는 홍수가 많았어요. 그래서 신도시 조성 후 40개 정도 호수를 만들었습니다. 홍수를 예방하기 위한 차원이기도 했지만, 지역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한다는 측면도 있었어요. 무엇보다 신도시 조성 과정에서 자연환경과 도시개발이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했습니다.” 우리의 신도시개발공사 격인 ‘에파 마른’(EPA Marne) 베트렁 우세 전 부회장의 설명이다.
마른 라 발레의 성공 사례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작 과거 프랑스 신도시 정책의 실패 경험에서 얻어낸 산물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프랑스는 1·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수도 파리를 중심으로 급속한 도시과밀화 현상을 겪었다. 이에 정부는 인구집중과 과밀화 해소를 위해 파리 중심 수도권 5대 신도시계획안과 라데팡스(대규모 오피스단지) 등 도시구조 개편안을 내놨다.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된 이 거대한 도시 재구조화 핵심은 파리 인근 지역으로 인구를 분산하기 위해 신규 주택단지를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도시개발학자인 장 미쉘 방성 파리지역연구소(L’Institut Paris Region) 박사는 “신도시 개발 초기에는 주택 분산을 위해 파리 북쪽에 고려 없이 대규모 택지만 지었다”면서 “하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택지개발 위주 정책을 하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우세 에파 마른 전 부회장도 “(신도시 조성 초기) 주택을 많이 지어 인구밀도가 높아지면 자연히 지역이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서 “하지만 지역 발전은 더뎠고 이주민들도 불편한 점이 많았다”고 말했다.
5대 신도시 막내 격인 마른 라 발레는 기존 신도시 정책의 반성에서부터 출발해 지금 모습을 갖췄다. 정부는 주택공급 위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을 수용해 신도시 건축지침 및 정책을 바꿨다. 1976년 확정된 파리권종합계획(SD)은 파리의 주택난과 교외지역 주택 난개발 방지를 위한 계획을 동시에 담았다. 이는 프랑스 신도시 개발의 전환점으로 기록된다.
파리 과밀화 해소에 초점을 맞춘 주택 난개발 보다는 ‘지역 사회 통합’이라는 관점을 중시한 것도 마른 라 발레의 조성 과정에서 눈여겨 볼 대목이다. 파리 인근 신도시의 주택공급 정책으로 임대주택이 늘면서 신도시로 저소득층의 유입이 늘었다. 이는 사회 범죄 증가, 특정 계층의 신도시 유입 등 부작용을 낳았다. 우세 전 부회장은 “(저소득층 위주) 공공임대주택을 먼저 건립하면 (중산층 등) 다른 계층이 신도시로 입주하지 않는다. 고소득층도 신도시로 유입돼야 사회통합도 이뤄진다”면서 “(신도시를 조성하면서) 우리가 처음 택한 주택건축 양식이 (빈부계층 간) 차별적이라는 것으로 알게 됐고 기존 정책을 완전히 바꿨다”고 말했다.
마른 라 발레의 공식적인 개발 기간은 1969~2000년이다. 하지만 다양한 계층 유입을 위한 실험은 이후 20년이나 된 지금까지도 빛을 발하고 있다. INSEE(프랑스 국립통계경제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마른 라 발레 지역 인구는 1968년 6만9607명에서 1990년 19만975명, 2016년 22만7440명으로 꾸준히 증가했다. 1990년 대비 인구증가율은 수도 파리의 법정 인구수가 2011년 224만9975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2016년 219만327명까지 감소한 현상과는 대조적이다.
지난 9월 19일(현시 시간) 마른 라 발레 신도시 내 디즈니랜드 파리로 관광객들이 줄지어 들어가고 있다. ⓒ시사저널e
지난 9월 19일 저녁 8시 30분(현지 시각). 마른 라 발레 4섹터 발 듀롭(Val d’Europe) 쉐시역 주변은 석양이 사라지고 불과 몇 분 사이 어둠이 짙어졌다. 디즈니랜드 파리에서 빠져 나온 관광객이 줄지어 RER 급행열차나 버스를 타기 위해 역사와 정류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역 앞 버스정류장에는 인근 호텔로 관광객을 실어 나를 무료 셔틀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피부색이 다른 승객들이 쏟아내는 각양각색 언어들로 소란스러웠다. 밀물처럼 디즈니랜드로 빨려 들어간 관광객은 이내 썰물처럼 빠져 나가고 있었다.
디즈니랜드 파리를 마른 라 발레가 유치한 데는 신도시 정책 을 계획·실행하는 시스템이 한몫했다. 가장 대표 사례가 공공개발공사 에파(EPA·Etablissement Publique d’Amenagement)다. 에파는 공공기관이라는 점에서 우리 LH와 유사하지만, 독특한 역할과 권한을 갖고 있다.
마른 라 발레 지역개발은 우선 신도시 구획에 포함된 코뮌(Commune)이 참여하는 다양한 형태의 ‘도시권공동체’가 행정·재정지원을 한다. 에파는 사업실행 및 집행 등을 맡는다. 하지만 인·허가권과 일부 재정 집행도 할 수 있어 도시권공동체와 에파는 협력, 견제하며 신도시 개발을 위해 공동 노력한다. 공적 기관이지만 사업적 마인드를 강조하는 에파는 디즈니랜드 유치 과정에서 빛을 발했다. 에파는 1970년대 말 발 듀롭 섹터에 대규모 테마파크를 조성하려 했지만 일부 지자체가 반발해 무산되자, 디즈니랜드 유치를 위해 유럽 인근 국가들과 경쟁해야 했다. 하지만 테마파크 유치를 이미 준비하고 있던 에파로서는 경쟁이 수월했다.
우세 에파 마른 전 부회장은 “에파는 지역발전을 위한 전문적이고 실질적인 제안을 한다”면서 “(디즈니랜드 유치 계약 당시) 디즈니랜드 사장이 (유치 경쟁국인) ‘스페인에는 장관을 제외하고 다른 조직이 없는 반면 프랑스는 전문 개발공사가 도시개발, 관광개발을 하고 실질적인 제안을 하기 때문에 프랑스를 택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장 미쉘 방성 파리지역연구소(L’Institut Paris Region)가 마른 라 발레 세르지(Cergy)역 인근에서 지난 9월 16일(현지 시간) 인터뷰 후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방성 박사 뒤로 오는 2025년까지 균형과 발전, 활력을 위한 프로젝트 목적으로 대형 복합센터 공사가 한창이다. ⓒ시사저널e
원래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정책 추진 과정의 지난함을 두고 농담 투의 말이 있다.
“프랑스는 여러 조직을 만드는 걸 좋아해요. 아주 프랑스다워요.” (On aime multiplier les structures. C'est très français. )
‘조직 만들기’를 좋아한다는 프랑스에서 신도시 관련 개발 기구에서도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유가 있었다. 신도시 개발 과정이 순조롭지 않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반 주(州·레지옹 region) 데파트망(Department)에서 ‘특별관리팀’을 구성해 신도시기본계획을 작성하도록 했지만, ‘관료 경직성’이 문제됐다. 이후 행정기관 역할은 줄이는 대신 신도시건설기획단을 따로 구성해 관련 부처 사업을 조정했다. 그러나 이해관계가 맞물린 지방자치단체끼리 업무조정이 순조롭지 못했고, 이에 도시공동체(communatue urbaine)가 결성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마땅치 않자, 1970년 7월 신도시법(Loi Boscher) 제정됐고 이후에도 관련 조직과 기구 등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러 실험 과정을 거쳐 수많은 변화를 맞았다.
다양한 기관과 단체들이 얽혀 있지만 신도시 조성에서 지키는 원칙은 있다. 먼저 관공서가 신도시로 들어가고, 기업이 들어간 후 맨 마지막에 사람이 들어간다는 원칙이다. 이는 신도시 조성 초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 지원으로 가능한 길을 만들었다.
방성 박사는 “고객이 없는데 상업지구가 반길 리 없다. 그렇다고 도시가 없는데 정부가 도로를 만들어주지도 않는다”며 “신도시 관계부처 사업국의 지원 덕분에 프랑스 중앙정부 회계감독관(inspecteur de finance)이 의장을 맡아 건설부와 문화부, 재정부 예산을 한 번에 모아 필요한 것을 묻고 지원을 했다”고 말했다.
현지 전문가들은 프랑스 신도시 정책의 특징을 정책 대응의 유연함과 섬세함, 그리고 지역민과의 호흡이라고 꼽았다. 방성 박사는 “보통 영어권 국가에서는 조감도를 바로 만들고 100만헥타르(㏊) 규모에 신도시를 순식간에 건설해버린다”면서 “(하지만) 프랑스는 여유를 두고 시간이 지나며 정책과 경제가 바뀌는 걸 지켜본다”고 말했다. 그는 또 “큰 프로젝트를 할 땐 크게 실패한다는 얘기가 있다”면서 “작은 프로젝트는 여러 개 중 일부가 실패해도 (실패가 작아서) 괜찮다”고 말했다.
피에르 떼발디니 마른 라 발레 지역 도시권공동체(Marne et Gondoire) 홍보국장은 “주민이 선출하는 의원들은 각자 본인의 이익을 생각하기 때문에 의견충돌이 있다”면서 “우리는 코뮌을 대신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과 지자체) 중간 지점에서 (가교 역할을 하며) 일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도시개발 등) 복잡한 정책을 추진할 때는 주민에게 정당성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면서 “중요한 정책을 시행할 때 주민에게 줄 이익을 설명하고 주민과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9월 18일 최근 이주민이 는다는 마른 라 발레 중심부 뷔시 생 조흐쥬 RER역 앞에서 공사가 한창이었다. RER 노선 위를 복개한 후 역 이용 시민들의 편의와 휴식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공사였다. 50년 역사를 자랑하고 도시 조성에 철학을 담은 프랑스 신도시 마른 라 발레는 여전히 진화 중이었다.
프랑스 신도시 개발 과정을 연구한 정창무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는 “프랑스 신도시는 (신도시 조성 시) 처음에는 관공서, 다음은 기업, 세 번째 사람이 들어가는 단계를 밟는다는 점에서 우리와 크게 다르다”면서 “프랑스 신도시를 걱정하는 핵심 주축 세력이 지자체나 기업이기 때문에 새로운 도시관리 기법을 집어넣고 혁신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평가했다.
※참고자료 :
외국의 신도시개발 사례와 교훈 - 프랑스의 수도권 신도시를 중심으로
신도시 활성화 방안 연구용역 보고서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