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4월 27일 목요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와대로1번지. 청와대 경내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달리 중대 발표가 있는 듯 어수선하면서도 무거웠다. 대통령이 주재하는 회의실 중앙에는 기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봉황 문양을 등 뒤로 상석에 노태우 대통령이 자리 잡았다. 그를 중심으로 부처 장관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도열하듯 마주 앉았다. 이날은 역사적인 수도권 1기 신도시를 발표하는 날이었다. 주택관계장관회의에서 노 대통령이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말에 일순 분위기는 더 엄숙해졌다.
“새 주택 건설과 관련해 그동안 보안을 잘 지켜왔는데 오늘 아침 분당, 일산이 사전 보도된 것은 어떻게 된 거죠.”(노태우 대통령)
노 대통령의 질책성 발언을 받은 것은 1기 신도시 조성 계획을 주도한 박승 건설부 장관이었다.
“ 일산만 해도 위장전입자와 무허가 건축을 막기 위한 호구 조사를 하는데 많은 인력이 동원돼 끝까지 보안을 유지하기 곤란했습니다.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박승 건설부 장관)
박 장관의 말이 끝나자 부동산 투기를 사정(司正)하는 이한동 내무부장관이 그를 거들었다.
“ 성남과 분당 지역에 무허가 건축을 억제하기 위해 경찰, 내무 공무원 등 500여 명을 동원했는데 현실적으로 보안을 지키기 어려웠습니다. ”(이한동 내무부장관)
1기 신도시 발표는 노태우 정부로서는 가장 공을 들인 정책 중 하나였다. 당시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 부동산 투기로 민심이 술렁이는 상황에서 집권 2년 차로 접어든 정부로서는 반전을 꾀할 수 있는 카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 발표 전 계획안이 언론에 일부 노출되고, 더욱이 신도시 관련 정보가 유출됐다는 풍문이 돌면서 정부의 ‘빅 이벤트’에 김이 빠진 셈이 됐다.
노태우 정부는 1989년 4월 부동산 가격 안정과 자족도시 조성 등을 명분으로 서울 인근 약 20~25㎞ 범위 내 성남 분당·고양 일산에 1기 신도시를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같은 해 부천 중동·안양 평촌·군포 산본 등을 추가로 조성하는 등 1기 신도시로 모두 5곳을 건립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정부가 당시 발표한 신도시 개발 계획은 시사저널e 신도시30년 기획팀이 대통령기록관에서 정보공개청구를 해 받은 건설부의 ‘주택대량공급을 위한 분당·일산 새 주택도시 건설 계획’에 담겨 있다.
하지만 정부가 발표한 1기 신도시 예정지로 애당초 언론 보도에서 언급이 많지 않았던 지역이 포함된 것은 이례적이었다. 1기 신도시 조성 계획이 연달아 나온 그해 신도시 수도 애당초 4곳 정도였지만 모두 5곳으로 늘어난 것도 시장 예상을 뛰어넘는 발표였다.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고양 일산이 신도시 후보지로 등장한 것이었다. 후에 알려진 것이지만 당시 고양 일산은 원래 신도시 후보지가 아니었다. 다음은 박승 당시 건설부 장관의 회고록 중 일부다.
“ (신도시 조성 발표 전) 당시 상황을 점검해봤더니 서울 시내에 집지을 땅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그린벨트는 절대 손댈 수 없다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땅은 없고 그린벨트는 손댈 수 없으니 대안은 그린벨트 밖에 신도시를 짓고, 지하철로 교통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도시 후보로 평촌, 산본, 중동, 분당 4곳이 나왔다. ”(박승 회고록-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그러다 정부 내에서 추가 신도시 후보지 선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주도한 것은 박승 장관이었다. 박 장관이 서울 강북지역에도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의지를 굳힌 것이다.
“ (서울) 강북에도 신도시를 건설하기로 하고 토지개발공사에 입지 물색을 지시했다. 그 결과 일산과 동두천 부근 2곳을 잡아 왔다. 그런데 동북쪽 입지는 교통문제 해결이 어려웠다. 대신 일산은 한강변이어서 도로를 내기도 좋고 최적의 조건이었다. ”(박승 회고록)
박 장관이 22대 건설부 장관으로 취임한 시기가 1988년 12월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일산신도시 추가는 권력 상층부의 결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박 장관이 오랫동안 일산과 인접한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살아온 덕분에 이 지역에 밝아 일산을 노 대통령에게 추천했다고 한다. 박 장관은 “노 대통령 역시 이 지역 9사단장 출신이었기 때문에 흔쾌히 재가했다”고 회고록에 남겼다.
주택건설 200만호 공약을 설계하고 주무부처를 움직이는 건설부 장관의 의지가 담긴 것이나, 추가 신도시 지정은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현 국토교통부 자료에 따르면 당시 1기 신도시 사업비는 모두 104조7000억 원인데, 일산신도시의 사업비는 그 4분의 1을 넘는 26조6000억 원에 달한다. 최고 권력자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다면 쉽게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노 대통령 자신도 대선 공약으로 내건 주택건설 200만호와 이를 뒷받침할 신도시 조성에 공을 들였다는 흔적이 곳곳에서 확인된다. 노 대통령은 당선 후 500여 건에 달하는 공약에 일일이 고유번호를 매기며 진행 상황을 확인했다는 언론 보도도 있었다.
500여 건 공약 중 주택 200만호 건설은 퇴임 후 노 대통령이 최고 치적으로 여길 정도로 애착을 보였던 분야다. 앞서 1989년 2월 24일 노 대통령은 취임 1주년 기념행사에서 서민들을 위한 주택 200만 호를 지을 것을 약속했다. 정권 말로 접어들 무렵인 1991년 2월 취임한 최각규 당시 경제부총리가 “200만호 건설 사업은 정부가 무리했던 게 사실”이라고 하자, 노 대통령이 크게 진노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일산신도시 모양도 지금과 사뭇 달랐다. 토지개발공사는 지금의 백마역(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백석동)을 중심으로 달처럼 원형으로 신도시 모양을 설계하고, 경의선 철도가 도시 한가운데를 지나도록 계획했다. 하지만 박승 장관은 그동안 철도 문제로 예산이 투입되는 선례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 경의선 철도가 시내를 관통하지 않도록 신도시 위치를 다시 잡도록 했다. 그 결과가 현재처럼 서울 3호선 전철을 품고 ㄱ자 형태로 약간 굽은 기다란 네모꼴 모양이다.
1992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경기도 고양시 일산신도시 지역을 방문해 사업 추진 상황 등을 보고받고 있다. 국가기록원 사진.
©시사저널e
1기 신도시 조성 당시 성남 분당 한 아파트 모습. 1989년 8월 시작된 분당신도시 사업은 1996년 12월 마무리됐다. 국가기록원 사진. ©시사저널e
권력의 상층부에서 이뤄진 신도시 개발과 관련한 일화는 일산뿐만 아니라 분당에서도 확인된다. 분당의 사연은 1970년대 박정희 정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분당은 ‘개발 불가’ 지역으로 여겨졌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1975년 5월 헬기를 타고 지나가던 중 분당을 가르키며 “앞으로 긴요하게 쓸 땅이니 개발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분당은 이후 15년 동안 그린벨트에 준하는 ‘남단녹지’로 묶여 개발이 불가한 지역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아껴둔 분당을 노태우 정권이 사용한 셈이 됐다. 분당이 신도시로 활용될 수 있었던 것은 문희갑 당시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영향력 덕분이라는 후문이다. 노 대통령과 대구 경북고 선후배 관계였던 문 수석이 분당을 노 대통령에게 신도시로 지정할 것을 요구해 결국 재가를 받았다.
1기 신도시 발표 즈음 정부는 부동산 투기와 전면전을 벌이고 있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부동산 투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을 관계 부처에 당부했다. 1989년 2월 8일 노태우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최근 부동산 가격의 상승으로 국민의 물가 불안 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북방정책추진과 관련한 토지투기현상과 상류층의 아파트 투기에 대해 적절한 대책을 강구, 부동산 투기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노 대통령의 지시는 1기 신도시 발표 3개월 후에 반영됐다. 1989년 7월 1일 동아일보는 “정부는 대기업들의 토지 투기를 억제하기 위해 대기업이 신규로 부동산을 사들일 때 주무장관에게 부동산 취득 명세서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하고, 비업무용 토지를 일정기간 보유하는 대기업에 대해서는 은행 여신을 중단하는 등 제재를 강화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정부가 이토록 부동산 투기에 집중한 배경에는 재벌들의 소유지와도 연결된다. 당시 노 대통령이 일산을 신도시에 포함시킬 것을 허락하면서 신도시 계획선에서 재벌들의 소유지가 제외됐다는 논란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일부 고위층들의 소유지가 일산, 분당 지역에 있어 이 일산과 분당이 신도시 후보지에 포함됐다는 설도 나돌았다.
국회에서도 야당을 중심으로 재벌 땅이 제외된 것에 불만을 쏟아내며 1기 신도시 전면 재검토와 백지화를 요구했다. 재벌 땅 문제가 1기 신도시 추진에 발목을 잡은 셈이다.
“분당신도시 주변에 극동건설 140만평, 통일교 270만평과 두산그룹의 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기형적 도시계획도를 만들었다. 일산의 경우 구릉지와 야산이 있는데도 이를 개발하지 않고 절대농지를 수용하려고 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일산·분당 신도시 개발 대책 논의 과정에서 재벌 땅이 도시개발계획에서 제외됐다. 신도시건설 계획의 전면적 재검토가 필요하다.” (1989년 5월 25일 평민당)
“신도시 건설계획이 재벌 등의 소유지를 제외시키는 등 현지 농민을 희생시키고 재벌의 이익을 고려하는 등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판단된다.”(1989년 5월 26일 민주당)
정부로서도 재벌 땅 문제에 몹시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재벌에 특혜를 줄 근거가 없다며 항변했다. 1989년 6월 1일 김보근 건설부 기획관리실장은 국회에 출석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비대한 대도시주변에 위성도시를 건설하는 것은 세계적인 추세입니다…(중략)…신도시 건설 추진과정에서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사전계획누설설과 재벌땅 제외 특혜설입니다. 누설 소문은 사직당국에서 진원지를 찾아 확인해본 결과 근거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재벌 땅 제외설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높은 산과 군사보호시설지구내의 재벌 땅은 개발원칙에 따라 제외됐지만 평지에 있는 재벌 땅은 모두 수용됐습니다.”
1989년 5월 3일 국회 건설위원회 제145회 8차, 5월 26일 제146회 6차 회의록. 당시 회의에서 일부 의원들이 일산·분당 지역 신도시 개발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냈다. ⓒ시사저널e
“현재 구상 중인 신도시는 주민의 취업기회가 전혀 없는 단순한 베드타운으로 되어 있다. 인구의 이동·집중은 주택을 짓는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인구 분산이나 도시 과밀화 해소 등 국민경제의 균형발전 문제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1989년 5월8일 경향신문 보도)
30년 전 신도시는 급조된 정책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돌이켜보면 신도시는 1989년 건설계획 발표에서부터 1996년 입주가 끝날 때까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정부는 1기 신도시 200만호 주택 건설 목표를 무려 5년 만에 달성했다. 토지 수용과 함께 분양에 돌입해 1990년대에만 주택 75만 가구를 공급했다.
1기 신도시 발표 후 4개월이 지난 1989년 8월, 강병기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는 대한토목학회를 통해 ‘도시계획으로 본 신도시 건설 문제점’ 논문을 발표했다. 베드타운에 대한 우려와 함께 단계적 발전 계획을 주문한 것이 특히 눈에 띈다.
“정부 당국자들이 개발한 대규모 주택지 사업은 밀실 속에서 기획된 것으로 보여진다. 2000년대를 바라보는 신도시는 무엇보다 쾌적한 환경이 확보돼야 한다. 분당·일산 투자계획이 어떻게 짜여있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지역 여건 변동에 따라 도시 구조를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하고, 단계적 개발도 고려해야 한다. 분당과 일산이 서울과 인접해도 결국 도시로서 기능해야지 거주 지역에 그치면 안 된다.” (1989년 8월 강병기 서울대 교수 논문)
국회 건설위원회 소속 의원들과 자문위원들 사이에도 부정적인 여론이 있었다. 세부적인 계획, 중장기 대책이 존재하지 않는 계획은 단순히 집값 잡기, 주택 단지 확대 수단에만 활용된다는 공감대가 이들 사이에서 형성된 것이다.
신도시30년 기획팀은 신도시 조성 중이던 1991년 1월 29일 건설부 주택국 공공주택과가 작성한 ‘일산도시설계를 위한 자문회의’ 결과를 입수해 살펴봤다. 한국토지개발공사가 개최한 자문회의에는 김기호 서울대 단지계획과 교수를 포함해 9명의 교수와 국토개발연구원 단지계획과 실장 등 총 12명이 자리했다. 자문회의에선 주로 일산 도시설계 과정에서 주거단지 도시설계, 상업·업무시설, 공공시설 등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자문내용은 모두 58개에 달했다. 이 중 51개가 도시설계에 반영됐다. 나머지 7개 미반영된 자문들은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주로 일산 신도시 개발 목적과 도시설계 구상 내용이 미비하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국회 관련 자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89년 5월 3일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열린 제145회 제8차 회의에서는 일산 지역에 대한 신도시 개발 효과에 대한 집중 논의가 있었다. 가장 쾌적하게 설계된 목동 주택단지가 100여만 평으로 개발됐음에도 장기간 미분양이 많았고, 중장기적인 대책이 없다는 비판이 주를 이뤘다.
당시 15대 국회 건설위원회 간사였던 김동주 전 자유민주연합 의원은 지난 11월 5일 기자와 인터뷰에서 “정부가 200만호 주택 건설 계획을 노태우 대통령 정부 시절 발표했을 당시 분위기는 갑작스러웠다는 게 대부분이었다. 건설위원회 소속 의원들은 도시를 수도권 팽창만 하는 목적이 아닌 도시가 균형발전이 있어야 하는데 신중하지 못했다는 공감을 이뤘다. 결국 주택 200만호 계획은 국민들의 호감을 얻기 위한 정책이었다는 지적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1기 신도시가 발표 직후 그때 거론됐던 신도시 문제점은 30년이 지난 현재 현실이 됐다. 김현수 단국대학교 도시계획부동산학부 교수는 “1기 신도시가 조성됐을 때는 국민 소득이 500~600불 수준이었으나 지금은 3만 불 시대고, 가구원 수도 과거 4인에서 3인으로 줄었다. 현재 사회·경제적 여건 변화는 분명 존재하는데 신도시를 만들어가는 방식은 여전히 과거와 유사하다. 급조된 신도시는 결국 도시별로 큰 차이점을 보이지 않고 있다. 도시별 특화된 정책성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1991년 1월 29일 건설부 주택국 공공주택과가 발표한 일산 도시 설계 자문회의 결과 보고. 국가기록원 사진. ©시사저널e